에스키모가 늑대를 사냥하는 방법을 아는가? 에스키모 늑대 사냥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
에스키모는 늑대를 사냥할 때 칼에 동물의 피를 묻혀 눈밭에 꽂아 놓는다고 한다. 그러면 피 냄새를 맡은 늑대가 찾아와 칼날에 묻은 피를 핥는다. 당연히 칼날에 늑대 자신의 혀에 상처가 생기게 된다. 그 상처에서 또 피가 흐른다. 그럼 늑대는 또 그 피 냄새에 계속해서 칼날을 자기 혀로 핥는다. 결국 늑대는 과다 출혈로 죽게 된다는 것이다.
제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고, 그대로 있다가는 죽게 되는 데 그것도 모르고 계속 자기 혀에 피를 흘리고 그것을 탐닉하는 것이다. 인간의 어리석음도 이와 같지 않을까?
쾌락과 욕망에 눈이 어두워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들이 많다. 물론 그렇게 살면서도 파멸하지 않는 인간군상들도 많다. 그러나 누가 자신 있게 사후 세계는 없다고 할 것인가? 만약 사후세계가 있다면 그런 인간들이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하지 않겠는가?
<늑대처럼 튼튼한 관절 이만기의 호관원 싸게 사는 법>
사후세계가 없다 해도 평소 그런 식으로 살게 되면 죽어서라도 뒤에서 욕을 먹게 된다. 그러면 그 고통은 후손들이 입게 된다. 정약용 선생도 목민심서에서 이르길 남에게 피해를 입히고 백성의 피고름을 짜는 인간들은 뒤에서 욕을 먹게 되고, 조상과 후손에게 저주를 쌓게 되는 어리석은 인간들이다라고 하셨다. 오직 자기 눈앞의 이익만을 쫓는 탐관오리들을 향한 질타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그런 인간을 심미적 인간이라 불렀다. 쾌락과 자기 욕심에 갇혀 사는 인간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 반성하게 되면 윤리적 인간으로 상승한다. 좀 더 윤리적으로, 타인을 위해 살게 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것도 곧 한계에 부닥치게 된다. 자기 실존의 궁극적 의미를 발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공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반성을 통해 최종 단계인 종교적 인간이 된다고 한다.
지금 내 모습은 어느 단계에 있을까? 심미적 단계일까? 윤리적 단계일까? 종교적 단계일까?
깊은 성찰이 없이는 종교적 인간이 되기는 힘들다. 그러나 최소한 윤리적 인간의 단계는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고, 자기 혀를 칼날에 문질러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을 피하는 길일 것이다. 에스키모 늑대 사냥을 통해 지금의 내 모습을 반성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