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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기토 에르고 숨

by 푸른 세상을 꿈꾸는 2022.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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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기토 에르고 숨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말이다. 아마도 들어봤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가 부모가 낳아줘서가 아니라, 신이 창조해서가 아니라, 지금 숨을 쉬고 있어서가 아니라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음이 확실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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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중요한 것은 맞다. 그러나 생각이 나의 존재를 증명해준다고? 그럼 생각하지 못하는 식물인간이나 백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건 아닐 텐데...

 

물론 데카르트가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는 사고의 명료성, 전제의 확실성을 추구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의심할 수 있는 것을 다 의심해 보았지만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이 사실만은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기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한 것이다.

 

 

유명한 영화 매트릭스를 생각해 보자. 지금 내 앞에 노트북이 있다. 그러나 과연 노트북은 존재하는 것일까? 영화에서는 눈앞의 모든 것은 AI가 잠들은 인간에게 꿈을 꾸게 하는 허상일 뿐이라고 한다. 정말 그렇지 않다고 단얼 할 수 있을까?

 

장자도 자기가 나비가 되는 꾸고선 자기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인간이 된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매트릭스의 이야기와 장자의 이야기가 다르지 않다. 아마 워쇼스키 형제(지금은 자매)가 장자를 참고해서 시나리오를 썼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사실 허상이라고 의심해 볼 수 있다. 그렇게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심지어 수학마저 의심을 했다. 그러나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지금 자기가 그런 의심이라는 사고 작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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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것조차 AI가 만든 허상이요, 꿈속의 나비라 할지라도 어쨌건 지금 생각을 하고 있다는 자체는 확실하다. 그것만이 확실하다. 그러니 그것이야 말로 존재의 확실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후 그의 이 명제는 후 폭풍을 몰고 온다. 그때까지는 비록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많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신학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였다. 즉 인간은 신이 창조해서 존재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니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신의 규범을 따르는 것이 당연시됐고 이를 어길 시는 종교재판에 회부되던 시기였다.

 

그런 풍토에서 이의 반발로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다. 르네상스는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는데 고전이라 함은 바로 그리스 로마 문화였다. 왜 그리스 로마 순화로 돌아가자고 한 것일까?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상을 보라. 인간의 나체가 그대로 새겨져 있다. 적나라하게 새겨져 있다. 희곡과 소설 역시 인간의 그런 면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그런데 중세 이후 신학이 지배하자 인간의 욕망은 철저리 배격당했다. 그렇기에 르네상스 운동은 신학에 대한 반발로 그리스 로마 문화로 돌아가자고 한 것이다.

 

여기에 데카르트가 인간의 존재 이유가 신의 창조가 아닌 생각한다는 것에 있다고 했으니 후폭풍이 없을 리 없었다. 이제 신학이 틀렸다고, 신학에서 멀어져 가도 괜찮다고 철학적으로 승인을 해 준 것이다. 이후 서양의 문학과 철학, 과학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그래서 데카르트를 근대를 연 철학자라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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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니체에 이르러 방점을 찍게 된다. 바로 '신은 죽었다.'라고 공포한 것이다. 그보다 조금 전에는 칼 막스는 역사는 계급 간의 투쟁이라고 했다. 신이 역사의 주인이 아니라 계급 간의 투쟁에 의해 역사의 수레가 굴러간 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전에는 다윈이 진화론을 주장했다. 생명은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생긴 유기물의 진화에 의해 탄생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19세기는 인간 사회에서 신을 몰아낸 시대가 되었다. 그 포문을 연 것이 데카르트였던 것이다.

 

어쨌건 내가 존재한다는 확실성은 '생각'한다는 데 있다고 한다. 코기도 에르고 숨.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어떻게 존재하는 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존재하는 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는 물음이다. 생각에 따라 존재한다. 과연 나는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항상 막힌다.

 

코기토 에르고 숨. 생각한다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존재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존재하는 데는 존재론보다 의미론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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