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로가 귀신 섬기는 것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아직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계로가 다시 물었다.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그러자 공자가 말했다.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논어에 나오는 공자와 제자 계로의 대화입니다.
삶과 죽음은 과연 무엇일까요?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 둘의 관계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것이 좋을까요?
유교는 죽인 조상을 공경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상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공자는 산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죽은 이를 섬기느냐고 합니다.
그리고 삶도 모르는 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느냐고 합니다.
돌아가신 조상을 잘 모시는 것을 덕목으로 여기는 유교인데
정작 공자가 그런 말을 했다니 의아합니다.
보통 유교에서 제사를 강조해서 죽은 사람에 신경을 많이 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꼭 그렇지마는 아닌 것 같습니다.
유교에서 죽은 이를 극진히 모시는 것은 결국 산 사람을 극진히 모시기 위함입니다.
보이지 않는 죽은 이에게 예를 다해야 산 사람에 대한 예도 강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은 보이지 않고 대화도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런 존재를 공경한다는 것은 사실 무조건적인 당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이를 잘 모신다면 이른바 '당위'라는 것이 정당성을 갖게 됩니다.
이 바탕에 산 사람에게 잘하는 '당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보이는 형제에게 잘하지 못하면서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잘하겠냐는 말이 나옵니다.
결국 눈에 보이는 이에게 진정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공자도 현실 세계의 질서를 위해 죽은 이를 공경하는 제사를 강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면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질서와 예의 등은 결국 사람을 위한 것들입니다.
예의가 있어야 질서가 생기고 질서가 있어야 그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로 초점이 모여져야 합니다.
능력 위주의 사회 풍토는 결코 사람을 위한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능력은 좋은 데 인간성이 나쁘면 결국 스탈린, 히틀러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악덕 사업주와 다를 바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좋은 것은 인간성도 좋고 능력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둘 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인간성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 구성원 모두가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현실 사회는 자꾸 반대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사회의 진화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성 좋은 사람이 정치를 하고 회사를 이끌고 학교를 이끄는 사회.
그 사회는 결코 도달하기 힘든 너무나도 이상적인 사회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