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철학책을 볼 때 항상 뭔가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다.
소크라테스야 말 안 해도 다 알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산파술 또한 잘 알 것이다. 산파가 아기를 받아내듯 소크라테스는 질문과 대화를 통해 상대로 하여금 진리(실은 개념의 올바른 정리)를 도출하게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산파술?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대화록을 보면 산파술이라는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상대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상대가 말하는 것에 대해 반대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렇게 해서 상대로 하여금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거기까지다. 여기서 더 나아가 상대로 하여금 진리(개념 정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해 용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고 하자. 상대는 소크라테스에게 용기란 전쟁터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그럼 더 큰 승리를 위해 후퇴하는 것은 용기가 아닌가 하고 반문하는 식이다. 오히려 후퇴에 대한 불명예를 감수하고서도 최후 승리를 위해 후퇴한다면 그것이 용기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덩치 큰 폭한을 만나서 자리를 피하지 않고 결투를 벌이는 것이 과연 용기인가 하고 반문한다. 그것은 만용일 뿐이지 않는가? 이렇게 상대의 의견 중 오류가 있는 부분들을 정확하게 집어내어 상대로 하여금 결국엔 자신의 의견이 틀렸다고 인정하게 만든다.
소크라테스 대화편의 많은 부분이 이런 식이다. 그들은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고 헤어진다. 다만, 상대가 잘못 생각하고 섣불리 생각했다는 것만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산파술은 소크라테스 대화법을 통해 진리에 이르게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뭔가 이상하고 개운치 않은 맛이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빼기
최근 책을 한 권 샀다. 오랜만에 철학 비스름한 책이다. 철학자의 책인데 약간의 철학 지식만 있으면 일반인들도 쉽게 읽히게끔 썼다. <소크라테스 스타일>이란 제목의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오랜 찝찝함에서 벗어났다. 개운하다. 소크라테스 산파술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저자(김용규)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산파술이 아니라고 한다. 이는 그간 여러 철학자들이 지적한 문제였다. 나는 그걸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논박술 또는 제거술 즉 '빼기'라고 한다.
산파술이란?
상대의 주장에서 틀린 부분을 지적하며 빼 나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상대로 하여금 자신을 또는 자신의 생각을 바로 보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그럼 산파술이란 말은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인가? 이는 플라톤의 이론이라는 것이다. 아는 대로 플라톤은 이데아 론을 주장했다. 플라톤의 대화록은 주인공이 항상 소크라테스다. 플란톤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즉 플라톤은 존경하는 스승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초기 작품들은 소크라테스의 생각임을 거의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후기 작품들은 플라톤의 사상을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데아 론은 후기 저술에 주로 나타나는 데 이는 하늘에 있는 이데아가 참 지식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크라테스 대화법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빼기를 통해 상대로 하여금 바른 개념 정의로 나가게 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고치게 한다. 즉 부정이다.
이에 반해 플라톤은 이데아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이데아로 인해 참 지식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이게 산파술이다.
좋은 책이란
소크라테스는 부정을 통해 바른 지식과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고 플라톤은 긍정을 통해 바른 지식과 행동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이데아론은 기독교에마저 영향을 미쳤지만 종교적 의미를 논외로 하면 솔직히 받아들이기 힘든 이론이다. 마찬가지로 칸트의 선험적 인식 이론도 받아들이기 힘든 이론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하늘 저 어딘가에 참 지식, 진리가 있다는 말은 종교에는 의미가 있지만 실제로는 의미가 없는 허황된 이론일 뿐이다.
다만 이데아를 인정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노력에서 많은 학문적 진보와 역사에 대한 긍정이 있긴 하다.
어쨌든 <소크라테스 스타일>을 읽으며 오랜 시간 궁금했던 한 가지를 풀었다.
좋은 책이란 이런 것이다. 객관적으로 좋은 책이 있고 주관적으로 좋은 책이 있다. 아무리 고전이라 일컬어져도 자신과 맞지 않으면 따분한 종이 뭉치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맞는 책은 비록 서점의 구석에 먼지 쌓여 꽂혀 있는 인기 없는 책이라 해도 자기에게는 좋은 책이다.
오랜만에 좋은 책을 만나니 기분이 좋다. 유붕이 자원방래 하지 못하는 시대에 좋은 책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이래서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친구와 수다를 떨 때처럼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고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