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보면 혈루증 여인 이야기가 나온다.
한 여자가 있었다. 이 여인은 혈루증 환자다. 가진 돈을 모두 다 써서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다녔지만 그녀의 병은 낫질 않았다. 가진 재산만 다 허비하고 말았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렬루증은 부정한 질병에 해당됐었다. 그래서 사람들 근처에도 가지 못하던 시대였다. 부정한 병에 걸렸으니 남들로부터 따갑고도 멸시하는 눈총을 받으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가진 돈도 다 떨어지고 병이 나으리라는 소망도 없다. 결혼했다면 아마 남편에게도 버림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살면서 많은 설움을 간직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이 여인도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잡으면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란 믿음이 생겼을 것이다. 이제 그녀에게는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더 이상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지 않을 기회. 무시당하지 않을 기회.
그녀는 부정한 몸으로 예수님에게 다가갔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에워싼 무리를 헤집고 예수님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누군가 이 여자는 부정한 여자다라고 소리라도 치면 자칫 몰매를 맞고 쫓겨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군중 속을 헤집고 들어가 드디어 예수님에게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혈루증 병이 그 즉시 나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편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하고 말해 주었다.
그 순간 육신의 병뿐 아니라 그 여인에게 있던 마음의 병까지도 치유가 되었을 것이다. 얼마나 서러웠을까?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삶의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 예수님은 육신뿐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도 치유해 주셨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딸아라고 말했을까?
당시 유대인들이 입는 옷에는 옷자락에 긴 술을 네 군데 달고 있었다. 그것은 모세 때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이다. 옷자락의 술과 이마에 경문을 다는 것이 그 시절 정통 유대인들의 풍습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신 율례였다. 즉 영적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것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하나님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타인의 옷술을 잡거나 떼는 건 상대에 대한 매우 큰 모욕이고 도전이었다. 그 사람의 영적 권위를 무시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아무나 옷자락의 술을 잡으면 안 되었다. 오직 자식들이 잡았을 때만 허용이 되었다.
즉 남의 옷자락을 잡는 행위는 비난받는 행위인데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딸아라고 말해 줌으로 인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는 행위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해 준 것이다. 그래서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받지 않게 배려해 준 것이다.
그리고 깊은 눈으로 여자를 보면서 딸아라고 말했을 때 그 여자는 아버지가 딸을 부르는 그 음성을 들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딸을 부를 때 얼마나 애틋하고 사랑스러우겠는가? 여인은 지금까지 비난을 받고 살아왔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부르는 따뜻한 음성을 들었다. 그로 인해 마음의 병까지도 치유받을 수 있었다.
예수님처럼 누군가의 병을 고쳐줄 수는 없으나 예수님의 마음으로 병든 자를 바라볼 수는 있다. 그런 마음이 있는가 돌아볼 일이다. 지금의 시대는 지식과 능력이 부족하여 힘든 것이 아니다.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에게서 느낀 따뜻한 마음이 부족하여 이 시대가 힘든 것이다.
그런 치유의 능력은 베풀 수 없을지라도 따뜻한 마음은 누구나 베풀 수 있다.
- 열린다 성경 참조 -